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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장로칼럼] 기도할 때 우리의 몸가짐ㅡThe Power of Positive Pr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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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매진
댓글 0건 조회 1,183회 작성일 21-06-3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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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항구를 떠난 돌핀호號가 점점 <에게 바다>를 향해 전진할수록 포구의 마을과 크고 작은 산들은 나의 시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끝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두시간 지난 후 배가 [에게 바다] 한가운데로 항해하면서부터 광대한 바다에는 배와 나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더욱이 성난 너울성 파도 때문에 배도 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도 속에 가라앉고 솟구치며 들볶이는 작디 작은 출렁이는 하나의 잎사귀, 일편엽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 그 순간, 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깊은 바다의 그 점 點 [하나], 그 한가지 집중된 [지점]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을 찾는 급한 기도의 목소리다. "주여,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지금도 주무시고 계시나이까?" 성난 너울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의 떨리는 믿음, 감사, 동경, 혹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뒤섞인 미세한 움직임일 뿐이다. 그분의 절대적 침묵과 무한한 진리의 빛 가운에서 나의 삶과 죽음을 주님께 송두리째 의탁한다고 고백하는 다급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때 나는 진실로 존재한다. 하나님 한 분과 뜨겁게 기도하면서 접촉하고, 지고한 완성에 도달하려고 몸부림 치고 있다. 내 영혼이 살아 있으려면 그 분을 뜨겁게 지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부림치고 소리치며 절규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기도다운 기도를 시작한다.

약 23년전 처참하게 살해된 [헬더 커마트]라는 브라질의 카토릭 신부가 있었다. 그는 폭력과 착취로 인해 절망과 고통속에 있는 가난하고 힘 없는 군중들을 위해서 두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비록 우리가 입을 열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절망과 고통과 공포속에 있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여기 이 땅 위에 계신 것을 인식하십시오. 땅 위에서 쫓기고 도망치는 발소리, 공포에 가득 찬 숨소리, 고문과 폭력, 성 착취, 린치로 절규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희망은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신앙과 이성, 지성과 감성을 잘 조화시킨 존경받는 스코트랜드의 신학자요 저술가며 기도의 영웅인 존 베일리<John Baillie> 역시 아침, 저녁, 날마다 마루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통회자복 하며 흐느끼듯, 두 손을 모으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마루바닥과 탁자를 내리치기도 하며 애곡하듯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기도자의 여러가지 자세나 모습들은 기도자의 기도에 대한 간절함과 절실함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과 자세를 만드는 것 같다. 기도하는 자세 가운데 가장 모본적이고 겸손한 것으로 널리 알려 진 것은 독일 [뉘른 베르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다. 독일의 화가요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명화이다.

일찍이 그림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집안 사정이 너무 가난해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뒤러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 친구와 이런 약속을 한다. 두 사람 중 한 쪽이 먼저 그림을 배우는 동안 다른 한 쪽은 노동을 해서 등록금을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뒤러가 먼저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그가 어느 정도 화가의 반열에 올랐을 무렵, 이제부터는 옛날에 약속한 친구를 그림공부를 시키기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그때 마침 그 친구가 일터에서 돌아와 기도하는 중 이었다. 그때 그 친구의 간절한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시여, 저는 험한 노동으로 손이 터지고 굳어서 이제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내 친구 뒤러만은 반드시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기도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던 뒤러는 두 눈에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즉석에서 연필을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 했다. 바로 이 연필로 그린 그림이 오늘의 명화 [기도하는 손]이다.

이렇듯 기도는 몸으로 하는 신체언어 이전에 가슴의 언어, 영혼의 언어이기도 하다. 기도는 찬 얼음물을 뒤집어 쓰듯 우리의 의식이나 생각이 번쩍 깨어나고, 눈과 귀와 입을 크게 열리게 한다. 머리에서 인식한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불 타고, 그 열기가 마침내 손과 발과 입으로 전달되어 여러가지 신체적 기도 언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기도는 하나님을 통채로 느끼고, 하나님을 무섭게 깨달아 아는 뜨거운 생명의 행위, 몸부림이다.

그러나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절박한 요구로 이루어질 때 더욱 강렬해진다. 바로 살아서 뜨겁게 움직이고 있는 기도의 산 증거가 바로 사도행전 교회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른 뜨거운 성령의 기도였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살아 활동하는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의지를 사랑의 인력에 끌려가게 하고, 자기 희생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무서운 힘으로 뜨거운 생명의 강가로 이끈다.

그것은 말, 문자, 언어로 하는 냉냉한 그런 차가운 기도가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는 뜨거운 몸부림이자 살아 있는 울부짖음이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고후 3:6]

적극적인 의미에서 살펴볼 때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는 기도언어이다.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로 말을 함으로써 진정한 신자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쳤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치고 싶은 사람이다" * [토마스 머튼:수상집 198p]

[적극적인 기도]의 저자 <존 비새거노>는 말한다. "기도할 때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라.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큰 길을 믿으라." 기도자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으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기도자들의 기도할 때의 여러가지 몸가짐에 대해 복음주의자 조오지 스터번즈 George Stephen은 기도를 지도하거나 기도 모임을 가질 때 마다 마루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듯 기도했다. 어떤 기도 전도자는 무릎을 꿇고 맞잡은 손을 어느 정도 들어 올린 채 기도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체로 수 많는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두손을 잡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며 만나는 성경 속의 인물들 역시 기도의 몸가짐이 다양하다. <여호수와>는 땅 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수 5: 14] <솔로몬 >왕은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해 두손을 펴고 기도했다.*[왕상 8:22]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다.*[단 6:13]

그러나 기도의 몸가짐에 대해 따로 정해진 모본은 없다. 가령 나는 아침에 조깅하면서 기도하거나 운전 중에도 기도한다. 기도는 걸으면서 할 수도 있고, 의자에 앉거나 러닝머쉰 같은 운동 기구를 타면서도 할 수 있다. [산책묵상] 이라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영성원 주변길을 산보하듯 걸으며 기도하기도 한다. 독일에 머물때 나는 아이펠 중세수도원의 숲 길을 두서너 시간 산책하며 시편 23편을 큰 목소리로 외치며 산책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는 몸가짐이나 자세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독일 수도원이나 산속 간이 기도소 -[cappella] 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기도자가 원하는 자세대로 기도하면 된다. [마라나다 기도연구회]같은 전문기도원이 말하듯 기도가 어떤 정해진 룰이나 자세라는 형식에 사로 잡히면 기도하는 마음은 안전히 소멸되고 만다. 수많은 영성가들이나 기도의 전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의 자세가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의 자세이다.

그렇다면 기도자의 올바른 기도에 임하는 마음 가짐 [Gesinnung]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마음 가짐으로 하나님을 감동케 하며 천국문을 열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찬양을 게을리한다. 찬양이 없는 기도는 우리 삶의 능력의 문을 열 수 없다. 찬양의 기도는 믿음의 문을 열고, 불신의 감옥에서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킨다.

[A W Tozer] 목사는 기도할 때 먼저 기도자의 이기심부터 무릎을 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기도자의 마음은 절대로 이기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자의 자만과 교만은 순수하고 힘있는 기도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성聖 [어거스틴]은 기도자의 정신을 강조하며 이렇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뜻을 저의 뜻으로 행하게 하시고, 저의 뜻이 곧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며 기도하라"라고.
위대한 복음주의자 [O Hallesby]는 "기도와 무력함은 떨어질 수 없다. 무력한 자가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다. 당신의 능력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이다. 이 기도가 소원만을 재잘거리는 기도보다 훨신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기도의 자세에 관해 의미있는 결론을 내린다. "마음에도 없는 통성이나 몸짓으로 기도를 어지럽히는 것보다 차라리 말 없이 마음으로 기도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라고.

 

그렇다. 기도는 어떤 자세나 몸가짐 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 기도의 정신 -Gesinnung 이 더 중요하다.

2021년  7월  10일

金 英 穆
수유제일교회:원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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